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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20 09:59
修鍊大會 結制法語
 글쓴이 : 돌부처
조회 : 666  
오늘은 대학생불교 수련대회修鍊大會 결제일結制日이다. 결제結制란 선가禪家에서 여름과 겨울 두 철 동안 삼 개월씩 나누어서 공부하는 기간을 말하는 것인데 이번 수련 대회는 십일밖에 하지 않지만 불조佛祖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이 곧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하였으니 열흘 동안이라도 족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무유정법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니 즉 정한 것이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결제는 발심發心하는 것이 결제요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날이 해제다. 오늘 결제 법문은法門은 법사法師가 일보 이보 삼사오보를 걸어서 법상에 올라앉아서 여러분들을 눈을 휘둘러서 한 번 보고 여러분들이 나를 보는 그곳에 법문이 있다. 그리고 법상法床에 법사가 오르기 전에 법문이 있고 청중이 법사가 뭐라고 하려는고 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법문이 있으니 이것을 잘 간파看破해야 한다. 법사가 설법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수련생이 손을 번쩍 들었는데 손을 드는 그 곳에 법문도 포함됐고 인사도 포함되어 있다.

  법을 법이라 하면 법이 아니요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요 선을 선이라 하면 선이 아니니 왜 그런가 하면 이 도리에는 일체 명상名相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일체명상이 다 떨어졌는데 이것은 도다 이것은 법이다 이것은 선이다 하고 이렇게 말로써 표현하면 벌써 까마득하게 틀린 것이다.

  이 법은 공기 가운데 전기 전자와 같아서 사람의 몸에도 통하고 물에도 통하고 산에도 통하고 삼라만상 어디에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듯이 이 법이나 도도 또한 어디에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예전 조사祖師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도라는 것은 무슨 신비스런 것이 아니라 진리이니 진리는 무엇인가하면 우리 인생의생명이다. 수도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생명을 알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 모인 수련생들은 세속학문을 배우면서 인생의 참된 길을 찾고 광명을 찾고 앞으로 나아갈 인생의 노선을 찾으려 하니 감사한 일이다.

  도를 묻는데 그 조사 스님의 말씀이 “담장 밖이다.”즉 담장 밖에 길이 있으니 도란 다른 것이 아니고 길이란 말이다.
그 스님이 말하기를
 “ 그 도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
 “그러면 어떤 도를 물었느냐 ”
 “대도를 물었습니다. ”
 “대도는 장안으로 통하였느니라. ”
그러니 산중에 있는 집이나 벌판에 있는 집이나 도시에 있는 집이나 자기 집 문 밖을 나서면 서울 가는 길로 다 통하여 있다는 말이다. 이 도는 어데에고 없는 데가 없건마는 모르기 때문에 도를 따로 찾는다.

  여러분이 처음 여기 통도사通度寺엘 찾아온 때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 왔는데 이 일주문은 기둥은 넷이지만 한 줄로 서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 한다.
  이 집이 설법을 하는데 예전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물건이 이에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명자名字도 없으니 위로는 하늘을 기둥 하여 괴이고 밑으로는 땅을 기둥 하여 받친다. 즉 천지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밝기로는 해와 같고 검기로는 칠통같다. 항상 움직이며 사용하는 가운데 있으되 거두어 얻지 못하는 이것이 무엇인고”하였다.

 그 한 물건을 표현한 것이며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니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니 그 하나를 표현하였으며, 공자孔子도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 나의 도는 하나로 꿰였다 하였으니 그것 또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를 내세우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서 들어오면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있는데 하나가 있기 때문에 넷이 있다. 천지가 벌어진 이치도 무극無極으로부터 태극太極이 있고 태극의 이의二儀가 생기고 이의二儀로부터 사상四象이 생겼다.

  예전에 어떤 거사居士가 사천왕을 보고 그 절 스님에게 물었다.
 “저 사천왕은 무엇 때문에 절 입구에 세워 둡니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옹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사천왕이 불법승 삼보를 옹호한다면 나라에서 불교를 탄압한 사태불교沙汰佛敎를 당할 때에는 삼보를 옹호하지 않고 어디 가서 있었습니까.”
 그 스님이 답을 못하자 이번에는 다른 스님에게 물으니
 “어느 곳에 사태불교가 있었드랬습니까.”
 그 거사가 웃으면서
 “그만하면 선원禪院 원주院主는 할 수 있겠는데 조실祖室은 아직 이르겠군요.”

  그러니 조실스님이 될 안목眼目을 갖추자면 그때 뭐라고 했어야 되겠는가. 이것도 종문宗門의 하나의 화제話題이다.

  사천왕문을 지나오면 불이문不二門이니 둘이 아니란 말은 둘만 아니란 말이 아니라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요 셋도 아니란 말이다. 일체 숫자가 뚝 떨어진 말이다.

  이 말은 예전 무착 문희無着文喜스님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서 대중大衆의 수효를 물으니 앞도 삼삼三三이요 뒤도 삼삼三三이라고 한 바로 그 말이니 이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 이 도리만 알면 불이문의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삼삼후삼삼 도리를 모르면 불이문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유마경維摩經 가운데 있는 말인데 부처님께서 삼십육보살을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문병차 보냈는데 거사가 삼십육보살에게 불이법을 물으니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고 명明과 암暗이 둘이 아니라는 등 여러 가지의 둘이 아닌 법을 잘 말하긴 했지만 이것도 맞지 않는 말이고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불이법을 물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언黙言하였다. 이 법은 입을 열면 그르친다.
 여기 적멸보궁寂滅寶宮에는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奉安하였기 때문에 등상불等像佛을 모시지 않았다. 사리탑의 모양은 종鐘 하고 흡사해서 이 사리탑을 석종탑이라 한다.
  범종각에서 울리는 큰 종소리는 온 산골짜기를 울리는 데 이 돌종은 소리가 없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 여러분들이 들을 귀가 없어서 못 들으니 수련 기간 동안 참선도 열심히 하고 수련을 잘 해서 저 돌종소리를 잘 들어서 그 소리를 가져오길 바란다. 돌아갈 때 돌종소리가 어떻다고 일러주고 가야 여기에 수련 왔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과나 배를 한 개 다 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콩알만큼이나 떼어 먹어도 그 맛을 알 수 있듯이 법문을 많이 들어야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를 잘 들어 알면 된다. 그물이 천코만코가 있더라도 고기가 걸리는 것은 한 코에 걸리며 경론經論이 많이 있지만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곳은 한 구절이다. 깨닫는다고 하니 공부는 하지 않고 깨닫기를 기다리며 알려고 하는 그것은 망상이다.

  그러기에 이 문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했다. 세상의 학문이나 과학은 익히고 배우고 이리저리 따져서 연마하지마는 이 일을 그렇게 해가지고는 점점 멀어지는 역행이다. 이 자리는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으며 이름과 형상으로도 얻을 수가 없다.

  누구나 자기의 몸을 자기라고 착각을 하고 애지중지하는 데 엄격히 따져보면 부모의 물건이지 자기의 물건이 아니다 자기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에는 버리고 가는 것이다.
  남의 집에 하룻밤을 자도 주인을 찾아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가면 무례한 사람인 데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을 모른다.

  여러분들은 내가 나를 찾아 진아眞我를 알아야 한다. 석가여래가 설산에 들어가서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모르니 국왕이 되면 무얼하겠나 하고 나를 추구하러 설산에 들어간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이 일이 큰일이고 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 마음자리가 어디에 있다가 부모태중으로 들어갔나 그것도 모른다. 또 죽는 날도 모른다. 이것이 네 가지 커다란 의혹인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가 죽는 것이 있는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니 불생불멸이 되는지 안 되는지, 가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먹고 입고 주하는 그저 그런 생활 속에 엄벙덤벙 살다가 가는 것이 불쌍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들이 간간이 세상에 출현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광명의 길을 찾고 영원을 찾고 인간의 참됨을 찾으려고 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세상에 모든 일이 인연因緣으로써 이루어지고 인연으로써 없어진다고 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데 이것도 혹은 인연이다 인과因果다 하는 것은 중생衆生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인 데, 인연이다 인과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깊이 진리에 들어가면 인연도 초월하고 인과도 초월할 수 있는 법이 있다.
  하지만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서 벌써 초월하는 경지를 말하면 안 된다. 그래서 말이 있기를 모든 법이 인연을 쫓아서 나고 인연을 쫓아서 멸한다. 우리 부처님 큰사문이 항상 이와 같이 설한다 하였는 데, 인과에 붙여서 말한다고 해도 우리가 한자리에서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말하게 되고 부처님의 정법을 듣게 되는 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이 큰 인연이다.
  하루를 동행하는 것도 천겁의 인연이라 하였는 데 정법을 설하고 정법을 듣는 이
인연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 그래서 예전 조사祖師 스님께서 말하기를 도반道伴 즉 도를 함께 닦는 도반은 부모형제보다 더 가깝다고 하였다.
 부모형제는 이 몸을 낳았을 뿐이지마는 도반은 세세생생世世生生으로 나고 죽는 것에 해탈을 하고 사람과 하늘의 사장師長이 되고 사람과 하늘의 안목眼目이 되는 일을 함께 닦는 사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형제보다 낫다고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말과 글로써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아무리 표현하려하여도 표현할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여러분이 통도사에 와서 오늘 점심을 먹었는데 그 밥맛이 어떻더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누구더러 밥맛이 어떻더냐 물어보면 맛있지요 하는 이도 있고 구수하다 하는 이도 있는 데 실은 밥맛을 알기는 알지만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밥맛을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하물며 일체 명상名相이 다 떨어지고 일체 유무有無 인과因果 언어言語가 다 떨어진 이 도체道體를 말과 글로써 표현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도 부득이해서 말로써 마음이다 성리性理다 원각圓覺자리다라고 말을 많이 하였는 데 그것은 밥맛을 말하는 데 하도 물으니까 이 사람아 밥맛은 말하기 어렵지만 밥맛은 구수하기도 하고 하니 그쯤 알아두라고 한 것밖엔 안 된다.
어떤 과수원 원정園丁이 나무를 하도 오랫동안 가꾸니 나무들과 이야기할 만큼 되었다. 그래서 나무들이 나는 목이 말라요, 나는 거름을 좀 주어요, 배가 고파요, 하는 것을 눈으로 들을 정도로 되었다. 학생들이 그 노인에게 나무 기르는 경험과 기술을 들을 기회를 마련해서 그 노인을 학교로 청했다.

노인이 수많은 청중 앞에 나아가더니 분필을 잡고 한참동안 생각한다. 학생들은 무슨 말을 하려는고 하고 기다리는 데 이 노인이 칠판에 글을 쓰려고 하다가 한참 멍하니 서 있더니 분필을 탁 집어던지고는 “나는 못하겠다. 천상 나무가 와서 말을 해야 하는 데 나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가 와서 하려고 하니 나무가 말을 못하고 내가 하려하니 말이 안된다. 이거 안되겠다”하며 내려오는 데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로썬 표현 불가능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거기에 호응해서 박수갈채를 보내는 청중들도 재미있는 수준의 학생이다. 그 원정이 말로써 설명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 원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잘 해준다 하더라도 못 알아듣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도 그 진진한 묘미는 말로써 설명이 안 되고 글로써 전달이 안 된다. 밥맛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구름이 영축산에 개니 천길이나 푸르고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가니 만리나 맑구나
  雲收靈鷲千尋碧
  水到洛東萬里淸

  할 한 번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