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귀봉(靈龜峰)과 학자수(學者樹) ◈

소수서원은 멀리 소백산의 주봉 비로봉이 좌우에 연화봉과 국망봉을 거느린
지맥이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가(잠룡) 서원이 위치한
죽계의 바로 앞에서 영귀봉으로 다시 솟아났는데,
바로 이 영귀봉을 의지하여 자리하고 있다.
소수서원은 멋진 자태의 오래된 적송들에 둘러쌓여있다.
평균 300 ~ 500년 이상된 소나무 군락이 "학자수"가 되어
선비의 굳센 기상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서원앞 500년된 은행나무는
서원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 37년 (1542)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 서원을 본떠 양반 자제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지도문(志道門)이라는 정문을 들어서면 강학당이 남향으로 바로 자리잡고 있다.
◈ 강학당(보물 1403호)과 편액 ◈


강학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으로 사방에 툇마루를 둘러놓고
배흘림기둥 양식을 사용한 특이한 구조이며 실내에는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5년(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받은
紹修書院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한다’는 뜻으로 학문 부흥의 의지를
보여주며 조선시대 민족교육의 산실로 인재 배출의 요람이었는데,
소수서원의 경우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이르고
그 중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소수서원 출신이라고 하니
대단한 학맥을 가지고 있다.
◈ 직방재,일신재 ◈

◈ 학구재,지락재 ◈

강학당 바로 북쪽에는 원장, 교수들의 집무실겸 숙소였던
一자모양의 직방재,일신재와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였던
학구재,지락재가 보이고,그밖에 문성공묘, 명륜당,
영정각, 전사청, 경렴정 등의 건물이 있다.
◈ 장서각 ◈

지금으로 치면 대학도서관이지만, 규모가 좀 작다.
하지만 여기에 무려 3천개나 되는 책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서책은 좌우지선의 예를 따라 으뜸 자리에 둔다고 하여,
직방재,일신재의 우측에 세워져 있다.
◈ 영정각 ◈


영정각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의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창설한 주세붕영정(보물 제717호)을 비롯해
주희, 이원익, 이덕형, 허목의 영정이 보인다.
◈ 소수박물관 ◈


죽계천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돌아서면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있고 그 옆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들어가면 바로 소수박물관있다.
소수박물관은 우리나라 유일의 유교종합박물관으로
순흥의 유물과 유적 2만여 점을 보존 전시하는 공간으로
모두 4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 백운동(白雲洞) 경(敬)자 바위 ◈

서원입구 오른쪽에는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가 음각된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숙수사가 폐찰 되면서 많은 불상을 버리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 썼다고도 하고,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밤만되면 혼령들이 울 게 되므로 연유를 물어본즉,
예전에 단종복위(端宗復位)운동 실폐로 희생된 넋들어었다.
주세붕이 날을 택해 위혼제(尉魂祭)를 드리면서
경(敬)자에 붉은칠을 한뒤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敬)은 주자철학의 근본으로 공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로써 원귀들의 한이 위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숙수사터 ◈


본래 소수서원은 흐르는 물도 하룻밤을 쉬어 간다는 통일신라시대
사찰 숙수사(宿水寺)터 위에 세워졌다
숙수사가 폐사된 경위는 상세히 알려지고 있지는 않으나 세조 3년(1457년),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역모의 땅이라 하여 순흥도호부가 폐지될 때
불타 없어졌다는 것이 유일한 역사이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소나무 숲 사이에 서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 59호)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석조 유물들이 옛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묵조밥 ◈

순흥 읍내에는 묵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어 외지인들이 별식이라며 즐겨 찾는데,
이 음식이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와도 관련 있다고 한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자 주모자뿐만이 아니라
역모에 가담했다는 굴레를 쓴 숱한 주민들이 희생되어 그피가
순흥의 죽계천을 따라 30리 밖까지 흘러내렸는데,
지금도 하류에는 ‘피끝’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남아있다.
순흥이 도호부로 명예회복될 때까지 200여 년간 조정의
감시와 핍박을 받아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나마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묵밥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소수서원을 나와 읍내사거리에서 초암사 팻말 보고
우회전, 저수지를 보고 3㎞쯤 들어가면 배점리 초암사 주차장이나오며
오른쪽으로 오르면 성혈사 왼쪽으로 가면 초암사이다
◈ 성혈사 ◈

성혈사를 오르는 길 양옆에는 설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길을 달려야 하는 ‘사과드라이브’ 코스다. 손을 뻗으면 딸 수 있는
사과들 사이 좁은 좁은 산길을 꼬불꼬불 올라가야 한다.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시멘트길이다.



성혈사는 성혈암이라는 현판을 매단 본당과 요사체 산신각과 나한전이
전부인 작은 암자 같은 절이다.
본당 뒤로는 밑둥서부터 부채살처럼 수많은 가지를 뻗고 있는 소나무 '만지송'은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 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
일천개의 눈과 손으로 고뇌 중생 다보살피는 관음보살이
성혈사를 보살피고 있는 듯하다
◈ 나한전(보물 제832호) ◈

전각 서너 채가 전부인 이 절에서 유일하게 격식을 갖추었다.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조그만 집으로, 안쏠림과 귀솟음의 수법이 역력하다.
1553년에 세우고 1634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마당에는 거북 등에 올라탄 용이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석등 두 개가 섰다.
나한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석등도 아름답다.
각각 거북의 등에 한쌍의 용이 뒤엉켜 올라가는 모습을 새긴 석등이다.
용의 머리를 단순화시켜 호랑이나 사자의 얼굴인 듯, 해학적으로 새겼다.

나한전에는 비로자나좌상을 중심으로 16나한을 모셨는데,
빛바랜 천장과 벽의 단청이 고색창연하다.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16분의 나한이 좌우로 앉아 있다.
표정과 자세가 모두 다른 나한들을 하나하나 찬찬이 뜯어보다 보면
그 소박하면서도 천진무구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나한전 뒤 공포의 빈공간 부분에도 마치 부처님이 모셔진 듯하다
◈ 나한전 좌우측 문짝◈




나한전 정면 세칸의 문짝들에 아로새겨진 문살이 참으로 눈부시다.
오른쪽에는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왼쪽에는 꽃빗살이 규칙적으로
정연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이 가운데문 두 짝인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눈을 의심할 정도로 어여쁜 풍경이 나타난다.
◈ 나한전 중앙 문짝◈

문짝 가득 연꽃이 소담스레 핀 연못이 찰랑거린다.
통판 네 개에 각각 다른 문양을 투각해서 이어붙였다. 사방연속이나
이방연속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새긴 민화풍 꽃창살로
유명한 강화도 정수사 대웅전과 같은 수법이다.
가히 전국 최고의 꽃창살이라 할 만하다.


연꽃 사이사이로 두루미가 물고기를 쪼고 있는가 하면,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도 있다. 물속에는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유영하고, 연못 위에는 새가 먹이를 향해 날아든다.

연못에서 볼 수 없는 게의 모습도 보인다. 게는 물과 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인 듯 하다 호젓한 산속에 이처럼 예쁜 연못을 지어
부처님께 바친 목수의 신심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오른쪽 문짝 아랫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앙징맞은 동자상이
연꽃 줄기에 매달려 낭창낭창 놀고 있다. 물고기, 새같은
동물 문양 속에 귀여운 어린아이를 슬쩍 끼워넣어
평화로운 연못 정경을 더 감칠 맛나게 표현했다.


오른쪽 문은 화려한 연꽃들도 장식돼 있다.
모두 긴 나무판 두세 쪽을 다듬어 새겼는데,
문짝 하나를 통째로 새긴 듯이 그림들이 유려하게 이어진다.
아직도 구석구석 남은 채색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빛이 바래어 더 고운 성혈사 나한전을 뒤로하고 초암사로 향했다
◈ 초암사(草庵寺) ◈

주차장에서 초암사에 이르는 좁은 계곡을 타고 오르면
계곡아래 물소리가 시원하다.퇴계 이황이 계곡의 절경에 심취하여
물 흐르는 소리가 노랫소리 같다 하여 경치가 빼어난 곳마다
이름을 짓고 죽계구곡이라 불렀다. 이 곳은 또 고려때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죽계별곡’(竹溪別曲)의 배경이기도 하다.
◈ 대적광전과 전각들◈



초암사는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로,
의상이 부석사 터전을 보러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으로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거석 축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적광전과 대웅전을 근래에 중창한 듯 하나 전체적으로는 초라한 모습이다.
다만 요사채 옆에 세워진 부도와 한 쪽 기단부가 마모된 삼층석탑,
그리고 이끼 낀 석축(石築)이 적어도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절임을 말해 주고 있다.
◈ 초암사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126)◈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사각형 지대석 위에 세워진 이중기단의 각 면석에 우주가 있고,
일주씩 탱주를 모각하였다. 각 층 옥신에도 우주가 있고,
옥개석 아래 4단의 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없지만, 주변에 그 파편이 흩어져 있다.

초암사 앞 2곡 바위벽엔 퇴계가 이름붙였다는 청운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초암사 지나 오솔길을 100m쯤 오른 뒤 팻말 따라 물가로 내려서면
제1곡금당반석이 나타난다. 아담한 폭포와 소 앞으로
너른 바윗자락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물살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습이다.
폭포 옆 바위에 ‘죽계 1곡’이란 글씨가, 물밑 바윗자락엔
물살에 닳아가는 ‘제일수석’이란 유려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마비로 인하여 수량이 풍부하여 흐르는 물소리가
우렁차고 흐르는 계곡물은 마셔도 좋을 만큼 깨끗하다.
절 주위에는 금당반석, 청운대외에도 용추비폭, 목욕담등
비경이 곳곳에 숨어있다.
죽계구곡(竹溪九曲)
박공수
의상(義湘)을 지키려고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된 선묘낭자, 어찌
의상이 거하던 초암골 옆
죽계에 머물지 않았겠나.
선묘의 정한 눈물
계곡물에 번지어
물소리도 애틋하게
수정처럼 맑히 흐르고
용으로 化한 몸매
구곡으로 춤을 추어
계곡도 그녈 닮아 구부구부 꿈틀거린다.
아, 뼛속까지 보여줘도
한 점 부끄러울 게 없다고
용추(龍湫)비폭도 백자담도 이화동도
속살을 훤히 내비치어
애절했던 사랑 기억 나는지
흐르는 물살로 활을 삼아
선묘룡의 구곡간장을 시나위로 뜯는구나
◈ 풍기인삼시장◈

풍기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인삼 생산지다. 삼국사기에는 소백산에서
산삼이 많이 자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산삼을 조정에 바치는 데서 폐단이 생기자 조선조 중종 때인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산삼 종자를 채취해
풍기 주변에서 재배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초암사를 나와 유명한 풍기 인삼시장을 둘러보고 늦은 점심을
지하 식당에서 인삼 가득한 소머리 국밥으로 해결하고 비로사로 향했다
◈ 비로사(毘盧寺) ◈



비로사(毘盧寺)는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산사이다.
680년(문무왕2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로서 불상,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어 이 절의 깊은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 진공대사보법탑비(도유형문화재 제4호)◈


비로사 경내에 들어서면 광배와 석탑 부재, 자기 그릇등이 여기저기
쌓여 있어 신축을 위하여 다시 발굴하는 듯하다
범종루 앞에는 거북받침의 비석이 서있다. 바로 진공대사 보법탑비이다.
진공대사는 신라 왕손으로 가야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고려 태조에게 나아가 후삼국의 통일을 축하하고 열반하였다.
이에 태조는 진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보법탑 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 적광전과 전각들◈



적광전에는 삼존불이 아닌 석조아미타 및 석조비로자나불 두분이 모셔져 있으며
전각 앞에는 석탑 부재로 만든 3층탑이 어색하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 석조아미타 및 석조비로자나불(보물 제996호)◈

비로사 석조아미타 및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말기인 9세기후반에 조성된 불상이다.
높이 1.13m의 아미타불은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로 현실적 사실주의가
잘 반영되어 있다. 옷은 왼쪽 어깨만을 감싼 형태이며,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쥔 상태에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보기드문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수인(手印)의 모습이고
높이 1.17m의 비로자나불은 단정한 얼굴과 안정된 신체의 형태로
아미타불과 같이 현실적 사실주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얇게 빚은 듯한 평행계단식 주름으로 자연스럽게 보인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양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두 불상은 단아하면서도 선의 특징, 몸의 자세 등이 대체적으로
9세기 후반 석불과 비슷하고, 동시에 나란히 아미타·비로자나불이
같이 있다는 점에서 9세기 통일신라 화엄불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라 하겠다.
◈ 희방사(喜方寺) ◈
희방폭포
정 호 승
이대로 당신 앞에 서서 죽으리
당신의 舍利로 밥을 해먹고
당신의 눈물로 술을 마신 뒤
희방사 앞마당에 수국으로 피었다가
꽃잎이 질 때까지 묵언정진하고 나서
이대로 서서 죽어 바다로 가리
◈ 희방폭포◈


비로사를 나와 희방사로 향했다. 희방사가 위치한 희방 계곡은
울창한 숲길에 하늘이 안 보일정도로 우거져 녹음이 짙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다리와 사다리가 인상적이다.
희방계곡을 한참 오르니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웅장한 소리가
더위를 가시게 한다 .희방폭포다
희방폭포는 소백산 연화봉 아래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수천구비를 돌아 흐르다 이곳에 멈춰 웅장한 폭포를 이루는 것이다.


폭포에서 피어오르는 물보라를 맞으며 계단을 오르면
폭포수는은 어느새 고요한 시냇물이 되어 길을 안내한다
계곡 끝에 희방사가 자리잡고 있다.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에 두운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어느날 두운조사가 산길을 가다 신음하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 호랑이는 사람을 먹고 목에 비녀가 걸렸는데 두운조사가
비녀를 빼주고 호랑이를 살려 보냈다. 그 후 호랑이는
두운조사의 은혜를 갚고자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다.
그 규수는 바로 경주호장의 무남독녀였다.
경주호장은 자신의 딸을 살려준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코져
이 절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 두운조사의 참선방이란 것을 상징하는 방(方)을 써서
희방사(喜方寺)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전각들 ◈




희방사는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 대웅보전과 삼성각 계곡 건너 비로전이 있으며 비로전 옆
범종각에는 은은한 종소리로 유명한 희방사 동종이 보관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 법당과 보관 중이던 훈민정흠의 원판, 월인보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었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