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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29 13:19
봄소리
 글쓴이 : 돌부처
조회 : 2,947  
우리가 알려고 하는 이 자리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일체 상대적인 것이 떨어진 자리다. 시절은 춘삼월 호시절이라 우주에 춘관이 도래하여 시냇물은 잔잔히 흘러가고 꽃은 웃고 새는 우짖는데, 禪窓에 一炷淸香의 爐烟은 우리 집의 묘한 풍광이여 곧 다함없는 진리이다. 봄이 오니 새 우는 소리도 봄에 우는 소리가 다르다.

 겨울에는 추워서 근근히 움츠리는 소리로 우는데 봄에는 아주 활발한 활짝 핀 울음소리다. 물은 잔잔히 흘러가고 산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하는 여기에 법문이 있다. 법문은 법사의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모두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기 전에 눈썹 말을 전하고
  묵연히 눈으로 미소를 짓네
  聲前眉語傳
  黙然眼微笑

  目擊에 道存이라,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가만히 참선하고 있는 것이 극락세계 소식이요 이것이 안락처요, 이것이 佛境界에 들어가는 것이다. 탐심 진심 모두 망상을 다 쉬고 모든 생각이 붙으려고 해도 붙을 수가 없는 그 경지, 천진난만한 동심에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항상 마음이 편해야 하고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태연부동 해야 한다. 마음이 바쁘면 몸도 바쁘게 되니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태연해서 안락처를 얻어야 한다.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가면 편안한 것이 들어와서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런데 속에 분멸망상의 도적이 들어 있으니 항상 불안한데 그것을 없애고 가라앉히고 쉬어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가면 편안할 뿐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이 百千日月보다도 더 밝아지고 백 천 바닷물보다 더 맑아지는 이? ??경지가 들어온다.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이 자리가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인데, 자기가 잘못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픈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에 편안하고 즐겁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자연히 불안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불안해지는데, 마음이 바르고 맑으면 항상 편안하고 즐거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부처님 말씀이다. 또 바르지 못하면 위태롭고 근심이 있다. 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 몸을 아무리 바르게 하여 앉고 서더라도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바른 게 아니다. 몸이 바르고 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智慧가 있어서, 무슨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그 말의 落處를 안다.
 
  그 말을 무엇 때문에 끄집어내는지 말을 다 안 들어도 안다. 정신 수련을 하면 모든 면에 통찰력이 빨라지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금을 캐면 금속에 은도 들어있고 철과 연도 들어 있는데, 잡철을 다 빼고 이십사금이 되면 세계에 통용되는 보배가 된다. 보검을 만드는데도 쇠를 불에 넣어 달구어서 자꾸 두드려 쇠똥을 모두 빼내고 쇠의 정수만 남아 두드려도 아! 무런 잡철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두드린다. 다시 불에 달구어 최후에 물에 건져낼 때에 온도가 덥지도 차지도 않는 거기에 건져내는 그것이 묘가 있는 것이다. 거기서 보검이 된다.

  우리가 본래 천진난만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데 탐·진·치 삼독과 팔만 사천 가지 번뇌를 일으켜서 모두 잡철 붙듯이 붙어 있다. 우리가 불교를 믿어서 마음도 바로 하고 그 마음속에 아무 잡된 생각이 없으면 순금이 되고 보검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른 뜻을 가지고 자비를 베푸는데, 자비는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보살의 행하는 곳이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요달하여 본다(了見)’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욕되는 것을 참는데 머물러서,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순한 마음을 지닌다.

  아무리 중생들이 수행을 잘하고 인욕을 잘해도 부처님의 과거 因行 당시와 비교할 수가 없다. 누가 와서 너의 눈을 빼주면 내가 꼭 쓸 때가 있으니 좀 빼달라고 조르니 쑥 빼주었다. 그러나 눈은 쓰지도 않고 발로 땅에다 문질러 버렸다. 그러니 얼마나 괴씸 하겠는가.
 
  그래도 태연부동해서 動하지 않으셨으니 不動地에 이르러 그렇게 되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 졸폭하지 말고 또한 놀라지도 말아야 되는데, 산에 풀밭 길을 가다가 꿩이 푸드득 하고 날아가면 깜짝 놀란다. 길을 가더라도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공부가 있으면 푸드득 할 때 꿩인 줄 알고 놀라지 않는다.
 
  우리가 알려고 하는 이 자리는 마음을 두어서 구하지도 못하고 무심으로써 얻지도 못한다.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忘想 없는 그것이 無心이다. 言語로 짓지도 못하고 말로써 어떻다고 말할 수도 없고, 문자로 ! 이 자리를 어떻다고 형용할 수도 없고 寂黙으로 통할 수도 없는 자리다.

  四弘誓願은 네 가지 큰 서원이다.

  가없는 중생을 서원코 건지리다
  다함 없는 번뇌를 서원코 끊으리다
  무량한 법문을 서원코 배우리다
  위없는 불도를 서원코 이루리다

  이것은 네 가지 큰 서원인데 흔히 요새 말하는 서원이고, 禪家의 사홍서원은 이렇다.
 
  배가 고프면 요긴히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더 입고
  몸이 고단하면 발을 쭉 펴고 누워 자고
  더우면 시원한 바람을 사랑한다

  이것이 선가의 네 가지 큰 서원인데 우리 일상생활을 제쳐놓고 무엇을 하겠는가. 일상생활이 그대로 불법이고 도다. 눈만 끔적하고 소리 한 번 지르는 여기에 도가 있고, 밥하고 옷 만들고 농사짓고 장사하는데 도가 있고, 밥 먹고 대·소변보는 데 모두 도가 있다. 도를 모르니까 도를 찾지 그곳에 다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 첫머리에 “부처님이 밥 먹을 때를 당해서 가사를 수하시고 발우를 가지고 舍衛大成에 들어가서 차례로 걸식해서 本處에 돌아와서 밥 잡수시기를 마치고 옷과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죄를 펴고 앉으셨다.”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 소중한 경전에 밥 얻어먹고 밥을 다 먹고 발 씻고 좌를 펴고 앉는 것을 經初에다 넣었겠느냐 말이다. 眞理가 거기에 다 있다. 이것을 경 읽는 사람도 예사로 넘기고 배우는 學人도 예사로 그 대목을 넘긴다. 무엇 때문에 밥 먹고 발 씻고 좌를 펴고 앉는 것을 넣었는가를 모르고 그냥 넘어간다.

  劇으로 멋있게 도를 편 일이 있다. 누가 창안 했는지 몰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주 멋진 도인이 구상을 한 것이다. 극으로 불법을 편 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