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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1-0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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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박문수와 용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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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돌부처
 조회 : 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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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말엽에 있었던 일이다.
모든 것이 성의가 지극하면 이루어지게 되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 부모가 자식을 낳지 못하여 3년을 두고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에 음식을 잘 차려놓고 하인을 시켜 시장에 어떤 스님네든 한분씩 청하여 대접하였다. 이 뜻은 승려는 블.법.승 삼보 가운데 든 사람이니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이렇게 3년이란 세월을 보내도록 성심성의를 다 하는 것은 오직 자식을 하나 얻으려는 생각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 3년이 되는 장날, 시장에 스님을 청하러 하인이 가니 그날은 한분도 없어서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자 얼굴이 부어터지고 손과 발에서 고름과 피가 흐르는 문둥병 걸린 스님 한분과 만났다.
데리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른 스님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데리고 가서 대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주인을 보고 그 사정을 말하니 상전이 흔연한 모습으로 사랑에 영접하라 하였다. 사랑에 들어가는데 발자국마다 마루에나 방바닥에 피 고름이 흘러 묻는다. 그래도 마음으로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흔연히 음식을 주어서 먹게 하였다. 음식을 먹는 데도 숟가락이나 젓가락에 피 고름이 묻고 음식에도 흘러보기 흉한 지경이었지만 주인은 변색이 없었다. 밥을 다 먹고 갈 때 주인이 하는 말이
“다른 데 가서 우리 집 사랑에서 얻어먹었다고 이야기 하지 말게.”
하니 그 문둥이 스님이 말하기를
“당신은 다른 데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부인이 잉태가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문수보살을 친견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이름을 문수라 하였으나 성인의 이름을 바로 쓸 수가 없어 한자 고쳐 빼어날 수秀자로 한 것이다.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아이를 낳은 까닭으로 그 아이가 재주와 정신이 보통 사람보다 초월하였다.
그 후에 나라에서 암행어사직暗行御史職에 봉하여 팔도에 과객같이 다니며 민간의 선악을 다 조사하여 백성의 억울함이 없도록 하고 상賞 줄 사람은 상을 주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당시 박 어사가 오대산에 가서 산세도 구경하고 수양을 겸해서 석 달을 머물렀다. 박 어사의 행색이 과객 차림이나 당시 다른 사람들은 일개 과객으로 알고 박 영감에게 불도 담아 오라하고 물도 길어 오라하여 존칭도 없이 함부로 하여 푸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이 적었다.
그 점 저 점 마음 가운데 불평으로써 모든 사찰에 역사役事를 많이 하도록 하게 하였다. 그 때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도 역사가 많아서 용파龍坡대사가
“내가 서울 가서 어떤 권력 있는 대신에게 말을 하여 이 역사를 혁파革罷시키리라.”
하는 서원을 세워서 산중 스님네들에게 발표하고 정조대왕正祖大王 즉위한 9년 乙酉年 가을에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칠백여리 한양성에 도착하였다.
유력한 대신을 알아서 사찰의 역사를 혁파하기로 원력은 세웠지만 우선 먹어야 할 터이니 부득이 한강물을 져다가 민간에 주고 이것으로 우선 생활 계책을 하였다.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대신을 친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원을 이루지 못한 채 삼년이 마지막 가는 날 밤을 그럭저럭 지새우는 데 그날 밤 정조대왕이 꿈을 꾸는데 남대문 이층에 올라가 보니 숭례문 밖 셋째 집 위에 청.황룡이 백도 광명을 놓아서 하늘에 사무치는 것을 보았다.
그 이튿날 아침 새벽에 어전 별감을 불러서 명령하기를 숭례문 밖 셋째 집에 가서 낯선 사람이 있거든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어전 별감이 그 집에 가보니 다른 사람은 없고 파계사 용파대사가 있었다.
“웬 사람이 이곳에 와 있느냐? ”
하니 용파대사가 자기의 소원을 일장 설명하였다. 어전 별감이 말하기를, 조정의 대신을 친하려고 하였지만 대신보다 나라 어전에서 오라고 하니 가서 무슨 말을 하던지 하라고 권하고 데리고 어전에 이르렀다.
임금이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용파입니다.”
“이름에 용 룡龍자가 들어서 내가 지난 밤 꿈에 용을 보았구나, 어째서 이 한양 장안에 왔느냐?”
용파대사가 세세細細한 정곡情曲과 원하는 바를 원하는 바를 말씀드렸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내가 사찰에 폐되는 것은 폐지하여 줄 거이나 내가 하늘에 사무치는 원이 있다. 첫째는 선왕先王께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서 정토에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하여 명년 봄에는 수원水原 현륭원顯隆園 부근에 사찰(현 수원 용주사)을 건축하고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조성하여 부모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대신에게 명령하였으니 이것은 용파대사의 힘을 빌지 않아도 되는 것이요, 둘째는 내가 나이가 많으나 세자世子가 없으니 원컨대 용파대사가 명산성지에 백일을 치성하되 한양 백리 이내에 기도처소를 정하면 궁인宮人과 예관禮官이 참배하도록 칙령勅令을 내리겠다.”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에서 공부하던 농산聾山스님이 근일에 한양 근처에 와 있으니 그 사람과 둘이 기도를하겠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데리고 하든 알아서 하게.”
그래서 북한산하北漢山下 금선암金仙庵에는 농산이 기도하고 흥인문興仁門 밖 40리 수락산水落山 내원암內院庵에는 용파대사가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70여일이 지난 뒤에 용파대사가 선정禪定 중에 관하여 보니 작은 나라이지만 임금의 지위에 오를 사람이 없고 모두 망상과 진뇌심과 남을 해롭게 할 생각이 차 있어서 나라 세자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나라 임금 원을 성취하게 하려면 내가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농산이 죽든지 해야 되겠다는 것을 알고 그 해 기유년 2월 20일에 농산에게 편지를 하였다.
편지 서두에 안부와 수고한다는 위로를 하고
“내가 기도하던 중 선정에 들어 관하여 보니 사람들이 모두 육종범태肉種凡胎에 망상진뇌만 가득하여 세자 될 사람이 없으니, 내가 죽든지 스님이 되겠는데 나는 본사本寺에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화상은 자비심으로써 임금의 지위에 올라 임금의 원을 만족하게 하여 주고 만 백성을 위하고 불교를 위하여 그 자리에 나아가시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농산 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농산 스님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수락산 내원암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농산 스님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나라의 위축 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심었는데 이 기도가 마치기 전에 과果가 벌써 돌아왔구나.”
농산 스님이 화답했다.
“내가 출가 수도하는 것은 대도를 성취하여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이 되어 중생을 교화할 생각뿐이지, 이 몸이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꿈에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을 따라서 과가 당도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기도 회향일廻向日에 봅시다.”
라는 내용을 써서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용파대사는 자기가 보낸 편지 내용과 이 회답 편지 두장을 잘 써서 두었다. 회향하는 날 저녁에 농산 스님은 자기 방에서 혼자 중얼거리기를 ‘사십년을 어찌 망건을 쓰고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 말은 자기 몸이 죽어서 사십년 동안 임금 노릇할 것을 미리 알고 예언한 것이다.
이 말은 상좌가 곁에서 들은 말이다. 그날 밤 농산 스님께서는 고요히 입적入寂하였다.
그리고 정조대왕과 그 왕비의 꿈에 태어나는 것을 미리 현몽 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기도처에서 농산 대사가 입적하였다는 소식이 임금에게 전해졌다. 임금이 이 일은 용파대사가 사유를 잘 알 터이니 불러들이라 하였다. 임금이 용파대사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라의 위축기도 회향하는 날인데 농산 대사가 입적하였다 하니 어찌 이런 불상사가 있을 수 있겠소? ”
용파는 전에 농산에게 편지한 사본과 농산에게서 온 회답 편지 두장을 임금에게 올리며
“이 두 편지만 보시면 그 사유를 알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그 편지를 보니 하나는 죽으라 하고 하나는 회향날 보자고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임금의 꿈과 왕비의 꿈에 명확히 현몽한 것이니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 이듬해 경술庚戌년에 세자가 탄생했는데 이름은 공蚣이요 자는 공보인 데 이 분이 커서 왕위에 올라 순조대왕純祖大王이 되었다.
이 사실을 법문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든지, 또 영 없어지는 지, 환생을 하는지를 알려주고자 함이다. 또한 과거에도 그런 환생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지만 조선조 때 있었던 일을 한 구절 인용하여 여러 사람의 의혹을 풀어 주기 위해서다.
서로 만나서 누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묻는가
산은 절로 높고 물은 절로 깊네
相逢誰問還家路
山自高兮水自深
할 한 번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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