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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8-01 09:33
結制示衆
 글쓴이 : 돌부처
조회 : 1,532  
오늘은 세존응화世尊應化 2996년 기유년 사월 보름 영축산 극락선원 여름 안거安居 결제結制 날이다.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山隱隱 水潺潺 山花笑 野鳥歌로다.

  霞登曉日하고 雨過靑山하니

  頭頭에 毘盧요 物物이 華藏이로다. 억!

  오늘 우리 성원에 여름 안거 결제를 하는데 결제법문結制法門을 하자니 아무리 천언만담千言萬談을 하고 팔만사천 경전을 입으로 설교를 하더라도 말이요 문자이다. 이 도리는 입을 열면 어긋나고 입을 열지 않으면 잃게 되고 그렇다고 또 입을 열지도 다물지도 않더라도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도리를 알려고 하는 것인데 이 도리를 경전에 혹은 마음이다 혹은 성리性理다 혹은 불성佛性자리다 혹은 한 물건이다 라고 하지만 그 밖에 무어라고 천언만담을 하더라도 다만 대명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 잘 그리는 이가 그려낼 수도 없고 소진․장의蘇秦․張儀와 같은 그런 구변口辯으로도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오고 가고 앉고 눕고 말하고 묵묵하고 고요하고 시끄러운 그런 일상생활에서 항상 이 자리를 쓰고 있고 화화초초花花草草 두두물물頭頭物物에도 이 자리가 온통 그대로인 것을 따로 찾고 있다.

  오늘 묵묵히 앉아 있다가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법상을 쳤는데 눈으로 주장자를 역력히 봤고 귀로 법상 치는 소리를 역력히 들었다.
  역력히 보고 들은 여기서 알아야지 그 밖에 따로 현묘玄妙한 것을 구한다면 이미 제이두第二頭에 떨어진 것이다.

  항상 눈으로 무엇이든 보기를 좋아하고 귀로 듣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주장자를 들어 보였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고는 산은 은은하고 물은 잔잔히 흘러가는데 산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해 지금 저 나무 위에 새가 호르르르 호르르 하네.

  산꽃 웃는 것이 법문이며 새 우짖는 소리에 법문이 다 들어 있다. 안개는 새벽하늘에 피어오르고 비는 청산을 지나가니 모든 만물이 비로자나 부처님이요 온갖 것이 그대로 화장세계로다.

  그리고 나서 할을 했는데 법문은 눈 끔적하는 데 알아들어야 한다. 여러분이 나를 볼 때 법상과 나의 몸 전체가 여러분의 눈에 다 들어갔고 내가 여러분을 볼 때에 여러분들이 내 눈에 다 들어왔다.

  눈이 서로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다. 이 도리를 알면 눈만 끔적해도 알고 손을 들어도 알고 발을 쑥 내밀어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부싯돌에서 불이 번쩍 하고 번갯불이 번쩍하는데 그 불빛에 바늘귀를 꿰더라도 오히려 둔한 것이다. 그보다 더 빠른 것이 있다.
  예전 신라 서울 만선북리에 한 과부가 있어 남편 없이 아들을 낳았다. 열두 살이 되어도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여 사복蛇福이라 불렀다. 그 어머니가 죽으니 고선사高仙寺의 원효에게 “스님과 내가 옛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함께 장사지내려 가세.”
  원효가 허락하고 포살布薩하기를 莫生兮其死也苦 莫生兮 其生也苦(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고 죽지 말지니 나는 것이 괴롭다.) 이렇게 간단히 잘 했는데도 사복이 “말이 너무 길다.”하고 고쳐서 말하기를 生死俱苦(나고 죽는 것이 모두 괴롭다.)라 하였다. 원효의 말이 그렇게 간단해도 한 방망이 맞았다. 전생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사복조사의 어머니가 되었는데 그 시다림尸多林 법문이 그렇다.

  이 마음자리가 본래 묘명청정妙明淸淨해서 대대對對가 끊어졌다. 이 촛불의 밝기가 전깃불과 같다.  또 횃불과 같다는 등은 상대적인 말이지만 이 자리는 상대가 뚝 끊어진 자리다. 이 자리를 금에 비유하고 물에 비유하고 해와 달에 비유하기도 하였지만 부득이해서 한 비유이지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이다.
  정법안장正法眼藏 의 도리는 물이나 공기와 같아서 우리가 물을 먹지 않으면 못 살고 나무와 풀들도 물을 먹지 않으면 못 살고 물가 없으면 일체 생물이 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도는 물이나 공기와도 같은 우리 무한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이 수행을 하자면 마음을 비워서 오만가지 망상을 버리고 천진난만한 동자 시절로 돌아가야 된다. 여기에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손가. 근심 걱정이 물질 아니면 사람인데 물질이나 사람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파서 어쩔 줄 모르고 산대서야 어디 살아가는 의의가 있겠는가. 짐승도 먹을 것이 있으면 쫓아다니면서 즐겁게 뛰노는데 그렇게 근심 걱정을 할 바에 무엇 하러 사바세계에 나오기는 나왔는가. 어머니 태중에서 나오지 말든지 할 일이지.

  이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법은 말해주기도 어렵고 보여주기도 어려운 일이다. 공부를 하는데 공연히 망상을 일으키기를 어서 공부를 성취하려 한다.  그렇게 성급한 생각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무슨 폐단이 생기는가. 우리의 몸 가운데 심장 간장 신장의 더운 불기운이 전부 위로 올라간다. 걱정을 하든지 공부를 어서어서 급히 하려 하든지 하면 불기운이 가슴으로 다시 올라가서 다시 머리로 올라가면 공부는 다 한 것이다.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가 아프니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상기上氣라 한다. 화두는 념念도 아니고 송頌도 아니고 관법觀法인데…… 관법도 역시 떨어진 것인데 자꾸 이 뭣고 하고 왼다. 또 무자無字 화두는 무 무 무 하고 자꾸 속으로 왼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또 더러는 신통 변화를 구하려는 이상한 병이 든 사람도 있다. 참선하다가 염불을 해서 성현들을 친견하려는 망상을 피우는 이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마음가운데 팔만 사천 마군이가 있는데 이 마군이가 부처가 되어 앞에 나타나든지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로 나타나서 법문을 들으라고 한다.
  공부를 해 나가면 본래 맑은 그 자리가 점점 맑아져서 광명스런 훤한 기운이 도는데 설사 석가여래가 나타나더라도 이 화두 공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불보살이 나타나더라도 한 방망이 먹일 용기가 있어야 할 텐데 부처가 나타나서 삿된 생각으로 절을 하거나 하면 미치고 마는 것이다. 훤한 광명이 나타나면 으례껏 그런 광명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이 화두만을 참구하여야지 전에 없었던 것이 나타났다고 해서 훤한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선은 다 틀린 것이다.
  이러한 폐단이 있기 때문에 참선은 선지식을 찾아가서 지도를 받아가며 해야 한다. 산에 올라가려면 같이 올라가는 이에게 길을 묻지 말고 산에서 내려오는 이에게 물어야 한다. 같이 올라가는 처지에 그 곳의 길이 어딘지 험한지 순탄한지 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나. 그래서 선각자를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화두도 간택을 잘 해야 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책에서 보고 화두를 참구하니 옳게 되겠는가. 병도 자랑을 해야 하고 공부도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선각자에게 물어야 한다.
  화두를 참구하는데 아주 절실한 비유가 있다. 예전 조사스님이 비유하기를 공부하는데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라 하였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양이가 가만히 앉아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쥐가 어디서 오는가를 살피고 있다. 딴 생각이 들면 쥐를 못 잡는다. 아무 잡념 없이 쥐가 오고 가는 것만 보고 있다. 요 말은 공안公案만 들고 있지 딴 생각이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러고 있다가 쥐가 얼씬 거리기만 하면 날쌔게 낚아챈다.
  그것이 미물이지만 이 고양이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면 재주가 비상하다.

  고양이 구렁이 이무기 등의 짐승이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면 재주가 아주 비상하다. 왜 그런가 하면 쥐 잡느라고 분별식심이 가라앉았고 구렁이 이무기도 굴에 들어앉아서 아무 공부도 하지 않지만 분별없이 가만히 있기 때문에 분별식심이 가라앉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렇게 재주가 있는 것이다.
  이 공부를 하면 정신이 모든 것에 초월하여 그런 짐승들의 식심을 맑히는 것에 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 김병기 대감의 말이 있다. 「금강산에 공부하는 중이 드무니 조정에 명재상이 안 난다.」고. 조정의 명재상이 되려고 하면 산중에서 공부하여 모든 망상을 쉬어야 한다.
 또 예전 조사스님이 말하기를 닭이 병아리를 까듯 하라 하였다. 이렇게 하였지 해설은 하지 않았다. 이것을 자세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절묘한 말이다. 아주 뛰어난 묘구妙句이다. 닭이 양물이라서 후비고 쪼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알 까라고 암탉을 안겨 놓으면 가만히 눈만 깜작깜작하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서 더운 기운만 계란에 전할 뿐이지 이거 어서 까야 되겠다든지 하는 생각도 없고 이거 왜 안 되나 하는 생각도 없고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더운 기운만을 전할 뿐이다. 이것이 오묘한 도리이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쫓아 내려와서 무엇을 주워 먹고 급히 올라간다. 계란이 식으면 안 되니까…… 주인이 그것을 알고 모이와 물을 아예 둥지 안에 넣어 준다. 화두 참구하는 이들도 물 흘러가듯이 쉬지 말고 꾸준히 계란에 더운 기운 전하듯이 이 화두를 들고 나아갈 뿐이지 거기다가 해석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과학은 따져야 하는 것이지만…….
  경을 많이 보았든지 학문을 많이 닦은 사람에게 화두를 일러주면 참구는 하지 않고 요리조리 따지려 드는데 이렇게 하면 점점 멀어질 뿐이다. 이 도리를 말과 글에서 찾으려 한다면 수은水銀을 풀밭에 흩어 놓고 그것을 주우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도저히 안 될 노릇이다. 그러니 다만 화두를 제기提起할 뿐이다. 닭이 알을 품고 더운 기운만 상속하여 주면 되듯이 화두의 의정疑情만 끌고 나갈 뿐이지 이리저리 맞추고 사량으로 분별하면 점점 멀어진다.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만 죽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것이 곧 생멸生滅을 받는 것이다. 이 생멸심이 곧 한 생각에 있는 것이다. 처음 공부할 때에는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멸하던 것이 오래 해 가노라면 그런 생멸심이 뚝 끊어진다. 전념후념이 뚝 끊어지는 것이다.

  앞 생각이 뒷 생각을 끌어들이고 뒷생각이 앞생각을 끌어들여서 전후념이 서로 밀고 끌어당기던 것이 뚝 끊어진다. 그것을 비로소 적寂이라 한다. 이 이름도 맞는 말은 아니지만 ……. 적적한 데에 들어가는 것이다.

  서산 스님도 금강산 중내원中內院에서 십 년을 공부하고 그 경지를 읊었는데

  坐斷諸人不斷頂
  許多生滅竟安歸
  앉아서 모든 이들이 끊지 못할 최후 결정을 끊으니
  허다한 생멸 마침내 어디로 갔는고

  앉으면 망상 생기고 앉으면 졸음이 오고 앉으면 혼침산란昏沈散亂에 그렇게 지겹도록 시달리던 것이 오늘날 찾아보려 해도 없다 이 말이다. 참으로 애먹은 말이다. 수좌가 공부를 밥 먹을 때에나 가나오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같이 쉬지 않고 물 흐르듯이 해야 되는데 그저 앉아서 졸다가 또 나오면 이야기하고 그렇게 방심을 하니 그러다가는 적적한 곳에 못 들어간다. 그러기에 예전에 어떤 노장이 대천수大千手 주력을 하는데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이렇게 하다가 시봉을 불러서 얘야 밥 촉촉하게 해라. 나모라 다나다라…… 얘야 된장국 끓여라 하고는 또 처음부터 시작이다. 그러고는 또 무얼 해라 나모라 다나다라…… 자꾸 이러다가 끝을 못 마친다. 섣부른 술장사가 단지단지 생침 준다 하듯이 나모라 다나다라를 끝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 뭣고 하던 것이 그만 망상이 생겨서 그 망상 따라 다니다가 그저 들면 화두가 있고 안 들면 없고 이렇게 지지부진 진취가 없거든 산에 가서 발을 쭉 뻗고 실컷 울어라. 뼈에 사무치는 울음을 울어야 한다. 이 공부는 철저하게 생명을 걸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돈 버는 것도 십여 년간 풍풍우우風風雨雨에 피땀을 흘려야 버는 것인데 하물며 무가보인 자기보장自己寶藏을 찾는 이 수행은 생명을 걸고 하지 않으면 도저히 힘든 것이다.
  그저 간단없이 오나가나 앉으나 누우나 일여一如해져서 전에는 그렇지 않던 것이 그저 밥 먹을 때에도 들리고 가도 들리고 대소변을 보든지 이야기를 해도 목전에 역력히 드러나는데 꿈 가운데서도 일여해서 화두가 독로獨露돼야 한다. 이럴 때에 만일 추호라도 지각심知覺心을 일으켜 분별을 하거나 의리義理로 따지려 한다면 순전한 묘를 잃게 되니 재삼 주의할 일이다.

  누구든지 학생 때가 좋고 처녀도 시집가기 전 부모 밑에 있을 때가 좋고 수좌들도 걸망지고 걸림 없이 선방에 다닐 때가 좋으니 아무쪼록 한 생 나오지 않은 요량하고 마음을 비우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나무칼로 목 베듯 하지 말고 단박 결판 지을 일이다.
  이 도리를 알고 행하면 일용만금日用萬金이라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안 쓰고 누가 쓸 것고. 세상 사람들은 그저 저만 잘 살려고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피워대며 분주하게 쫓아다니는데 수행하는 수좌들은 온갖 욕락을 떠나서 자기의 참 나를 찾아서 온 인류를 교화하여 구원하려고 하니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일인가.
  수좌들이 행운유수行雲流水로 걸망을 지고 선원을 다니는데 행각할 때에는 밥도 얻어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 촌가에 들어가서 지팡이로 싸립문을 드르륵 긁으면 강아지가 공공공 짖으며 나온다. 개를 짖도록 만든 것은 중 밥 일렀소, 이 말 전해주기 위해서다. 아침밥을 짓기 전에 한 칠팔 집에 가서 밥을 일러 놓는다. 부처님도 철가식을 하셨으니까……. 그렇게 일러 놓고 밥시간에 가서 걸식을 하면 꼬마가 자지를 달랑달랑 거리며 토장 조금 넣고 밥을 조금 가지고 나온다. 발우에 받아서 아침을 먹고 남으면 길을 떠나다가 정자 좋고 반석 좋은 곳에 쉬면서 공부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그것을 먹고 물도 마시고 밥이 남으면 나무꾼도 주고 행인도 준다. 이렇게 좀 쉬고 멋들어진 행각도 해봐야 된다.
  밥 얻어먹는 데 내라고 하는 아만심이 없어진다. 이렇게 밥 얻어먹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지금은 점점 세상 풍속이 각박해 가고 메말라 가지만 예전 우리 젊었을 때만 해도 세상 살아가는 풍속도 그랬다.
  공부가 가나오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같아지면 얼마나 좋은가. 공부는 오로지 자기의 신심과 정성을 들인 만큼 진취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선비가 제자에게 가르치기를 “맹자를 삼천 번만 읽으면 글 문리가 탁하고 터질 터이니 삼천 독을 하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맹자를 짊어지고 산중에 들어가서 삼천 번을 읽었는데 탁 소리가 날 턱이 있나. 탁 소리가 나지 않아서 선생에게 편지하기를 “맹자를 삼천 번 읽어도 탁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틀리는지 제자의 의혹이 몹시 대단합니다.”하였다. 그러니 처음 산에 들어갈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자네는 맹자를 삼천 번 읽으면 무슨 탁 하는 소리가 정말 나는 줄 모양인데 탁 하는 소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글 짓는 것이 바로 탁 하는 소리이니 이제 그만 돌아오게.”하였다.
  화두를 제기提起하는데 가고 오고 앉으나 서나 일여해지고 꿈 가운데나 깨어 있을 때나 일여해지면 홀연히 어떤 경계를 보든지 어떤 소리를 듣든지 할 때에 그만 그 의심 덩어리가 불꽃같이 일어나던 그것이 확 녹아진다. 그 의정疑情 덩어리가 불꽃같이 일어나던 것이 확 녹아지고는 자기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분명히 알게 된다. 분명히…….
  자기의 보배를 바로 캐내야 되는데 이 공부를 실답게 하자면 마음을 비우고 업장業障을 녹여야 한다. 업장을 녹이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누가 자기를 보고 잘못한다고 나무라면 설사 자기가 잘했더라도 아이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절 한 번 하면 그 때가 바로 그 업장이 녹아질 때다. 잘못했다고 나무라는데 내라고 하는 것이 가슴에 꽉 차 있는데 업장이 녹아질 수가 있는가. 그만 다 비우고 내가 잘했더라도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절 한 번 하는 그 때가 곧 다겁다생多劫多生에 지은 죄가 막 녹아질 때다. 그걸 알아야 한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것이 잠자고 이야기하고 시비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려는 그 한 생각뿐인 것이다. 시비가 생기거든 어쨌든 피하고 공부에만 전심전력해야 한다. 하루에 열 세 시간 열 네 시간씩 몰아붙이면 생사대사를 해결하려는 이 마당에 시비가 다 무엇이냐. 어림도 없는 소리다.
  망상이 일어나거든 네 이놈 네놈 말만 듣고 따라다니다가 내 신세가 요 모양 요 꼴이니 이젠 내 말 좀 들어봐라 하고는 죽나 사나 한번 해보자 하고 용맹을 내야 한다.

  鴛鴦繡出從君看
  莫把金針渡與人
  원앙새를 묻거든 원앙새 수를 놓아 보여 줄지언정
  수놓은 바늘이랑 주지 말아라

  할 한 번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