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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21 09:26
拖尸者誰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인가
 글쓴이 : 돌부처
조회 : 1,744  
법상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가을물 하늘까지 맞닿아 푸른데
  흰 갈대꽃에 밝은 달이 오가니
  온통 비로자나요 화장세계로다
  秋水長天에 上下가 圓融한데
  一色蘆花에 明月이 往來하니
  頭頭에 毘盧요 物物이 華藏이로다

  법은 듣는 사람이나 설법을 하는 사람이 아무 말이나 소리 없이 묵묵히 있는 거기에 법문이 있고 청법자가 자리에 앉기 전에 법문이 있고 종사宗師가 법상에 오르기 전에 법문이 있으니 이러한 도리를 알아야 된다.
  장사 잘 하는 상인은 여러 수백 명이 있더라도 서로 통하기 때문에 눈만 끔적해도 알고 손만 들어도 거기에 통하는 점이 있는 거와 같은 것이다.
  相見에 眉語渡라 서로 마주 보는 데 눈썹 말이 건넌다. 입으로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눈썹의 말로 건네는 다시 말해서 눈썹만 끔적해도 안다는 것이다.
  黙然眼微笑라 묵묵히 있다가 눈으로써 미소한다. 서로 허허 웃지 않고 입만 벙긋 웃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미소이다.
  여러분의 얼굴에는 둘, 눈이 둘, 귀가 둘, 콧구멍이 둘, 입이 하나이다. 이것이 요긴한 칠성七星이다. 눈으로는 온갖 것을 다 보고 귀는 온갖 소리를 들으며 코는 온갖 냄새를 맡으며 입은 온갖 음식을 다 먹는다.
  오늘 극락암 신도 법회에 오는 신도들은 높은 영축산의 산삼 썩은 물과 온갖 약초가 목욕한 물을 마시고 촉촉한 밥과 온갖 나물과 떡을 먹는다. 그 뿐 아니라 매일 들어봐야 오늘은 돈을 얼마 벌었느니 장사를 잘했느니 하는 시시한 소리를 듣는 귀에다가 일체 번뇌 망상이 없는 부처님의 말씀을 넣어준다.
  대게 사람들은 바쁘지 않은 일에는 바쁘다고 하면서 법문을 들으러 가기를 싫어하며 신문을 보는 데도 부모에게 효성을 한다고 포상을 받았다는 선행기사 같은 것은 예사로 넘기고 강도가 어디서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나쁜 기사 같은 것은 잘 본다. 좋은 것은 보기 싫어하고 가기도 싫어하는데 여러분이 법회에 와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환단이나 금단이라고 하는 신선의 약이 있는데 하나만 먹어도 일체의 병이 다 떨어지고 오래 살듯이 부처님의 법문을 한 번 들어서 여래장如來藏에 넣어 놓으면 여러분이 이승을 떠나 나쁜 갈래의 길을 헤맬 때 길잡이가 된다. 여래란 온 것 같으면서도 온 것이 아니고 간 것 같으면서도 간 것이 아닌, 즉 부처님을 말한다. 여래장이란 곧 부처님의 장고를 말하는 것이다.
  탐진치 삼독三毒과 팔만사천가지 진노심震怒心의 구름이 꽉 끼여 밝은 지혜의 눈이 없으면 나중에 눈 광명이 땅에 떨어질 때에 다시 말해서 죽어갈 최후 임종할 때를 당해서 자기의 지어 놓은 업業이 들어 있는 제팔식〔第八識:아뢰야식〕이 어디로 잉태되어 갈 적에 사람은 사람으로 보고 짐승은 짐승으로 보고 나무는 나무로 보아야 할 텐데 소나 말의 뱃속이 흰 깃발과 검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누각장엄으로 보여서 “아, 그 집 좋구나.”하고 그 누각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소나 말이 되고 만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죽어서 나귀의 탯줄 말의 배를 누각장엄으로 보고 들어가려는 것을 어느 스님이 “대승 법문을 들은 너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가느냐.”하고 고함을 쳐서 못 들어가게 한 일도 있었다.
  부처님이 안나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을 남에게 돌려 줄 수 있는 것은 자연히 너가 아니지만 돌려줄 수 없는 것은 너가 아니고 무엇이냐〔諸可還者는 自然非汝 어니와 不汝 還 者 는 非汝而誰오〕.”
  너의 옷이나 머리 손 발 오장육부 등의 모든 육체는 산산이 쪼개서 다 남에게 줄 수 있지만 여기 남에게 내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너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 말이다. 부처님이 아난존자의 귀를 뚫고 가르쳐 준 진리적인 말씀이다. 이 몸이 내 것이라고 애지중지하지만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생리적으로 따져 봐도 부모 물건이지 자기의 물건이 아니다.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소소령령昭昭靈靈한 이 자리가 곧 모든 사람의 자기이다. 이 자리를 발견하려는 것이 곧 자기를 찾는 일이다. 이것을 모르고 생각해봐야 쓸데없는 일이니 석가여래가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서 이 자릴 하나 깨달은 것이다. 사람이 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는 생로병사에서 자유자재할 수 있어야 된다. 이것이 생사해탈이다.
  사람 사람이 몸을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종문宗門=禪門의 1700가지 화두話頭중에 ‘송장 끌고 다니는 이놈이 누구?〔拖尸者誰?〕’라는 화두가 있다. 몸에 숨이 있을 때는 사람이지만 숨만 떨어지면 송장이다. 그러니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을 알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36물질 360골절 8만4천 털구멍으로 되어 있다. 이 몸뚱이는 뱃속의 태胎가 들어가서 만드는데 탯줄로 피를 돌게 하여 몸을 다 만들면 태어나게 된다. 태어나서 탯줄이 붙어 있으면 안 되므로 그것을 끊고 매어 놓는다. 며칠이 지나면 매어 놓았던 탯줄이 똑 떨어지고 입을 딱 닫아버린 배꼽이 된다. 우리 몸에는 눈이 둘 콧구멍이 둘 입이 하나 대소변 보는 데가 둘 배꼽이 하나 모두 합해서 열 개의 구멍이 있다. 딴 구멍은 열려져 있어야 하나 뱃구멍은 열려져 있으면 바람이 들어가서 죽기 때문에 꼭 닫고 있다.
  이 말은 왜 하는가 하니 참으로 진리적이요 요긴한 말이기 때문인데 부모가 자식을 낳았지만 그들이 성장하면 그냥 좀 놔두어야지 입을 열어 잔소리를 하게 되면 될 일도 안 되니 입을 닫아야 된다. 시어머니 잔소리는 꾸어다가 해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요새 여성들은 시부모를 모시지 않고 딴 살림을 차리려고 하니 시어머니가 될 여성들은 이 말을 단단히 들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러분은 항상 공부할 때는 열심히 공부만해서 국제적 인물이 되고 인천人天의 안목이 되어 여러 사람들을 지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워 앞길에 장애가 있고 실패를 하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앞으로 전진 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그것을 견디고 타파해서 성공을 해야 한다. 장수가 되더라도 지혜 덕 용맹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지려면 불교를 믿어 정신을 통일해서 마음 가운데 모든 번뇌의 구름이 없어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아경지無我境地에 들어가야 한다.
  예전에 암행어사 박문수가 헌 옷에 다 떨어진 갓을 쓰고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어느 고을에 억울한 일이 있는지 선비나 부녀자 혹은 아이들한테서라도 탐문하면서 다녔다.
 한 번은 어느 집 사랑방에 하루 저녁 묵게 되었다.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고 있는데 배우는 아이하고 가르치는 선생이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굴’이란 발음만 번갈아가며 계속하니 그저 ‘굴굴굴……’하는 소리만 들린다. 박 어사가 잘 시간이 되어 그 선생한테 묻기를 “천자문에 굴자가 없는 줄 아는데 굴이란 자가 무슨 글자 길래 밤중까지 굴굴굴 하느냐.”고 물었다. 선생의 대답이 “저 아이가 하도 재주가 없어서 굴레 륵勒자를 배우는데 굴레 륵을 한꺼번에 못 배우니까 한 글자씩 배워서 ‘굴레 륵’ 이것을 가지고 사흘 동안 배운다. ”고 한다. 박 어사도 참으로 그 아이가 재주가 없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른 뒤 나라 임금이 태평한 시절에 동지섣달 긴긴 밤을 무료하게 그냥 지낼 수가 없어 신하들을 불러 들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깃거리도 며칠간이지 허구한 날 매일같이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다. 그래서 신하들이 궁여지책으로 암행어사 박문수는 팔도강산으로 돌아다니면서 들은 것도 많고 본 것 도 많을 것이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할 것이라고 임금님께 아뢰어 박 어사를 불러들였다.
  박문수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한번은 어디를 갔는데 참으로 재주 없는 아이가 있어 천자문의 굴레 륵 자 한자를 사흘 배우며 굴굴굴 하던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웃음을 참지 못하며 웃고들 있는데 그 중에 한 신하가 일어나더니 “그때 굴레 륵 자를 사흘씩 배우던 아이가 바로 소신입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벼슬길에 올라 높은 신하가 되는 것이니 무슨 일이든 지극하게 힘을 들이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재주 없는 신하라도 둔공鈍功을 들이니 자연 영대靈臺가 밝아지는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육백부 반야의 골수로서 이 무상無上의 법문을 한 번 들어 놓으면 자기도 모르게 돌덩이 같은 죄업이 속에 있더라도 녹아진다. 금강쇠를 먹으면 그것이 안에서 삭지 않고 언제든지 밖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 마하摩訶는 큰 것을 뜻하는데 우리한테 천지보다 큰 한 물건이 하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반야般若는 지혜요 바라밀波羅蜜은 생사生死에 해탈하고 생사에 물들지 아니하고 생사에 초월한 그 자리란 말이다.

  나에게 있는 한 권 경전 종이와 먹으로 된 게 아니다
  펼쳐 봐야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큰 광명을 놓더라
  我有一卷經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常放大光明

  270자의 심경보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한 글자도 없는 심경이 진짜 심경이다.

  수미산을 붓 삼고 사해물 먹을 삼아
  하늘 땅을 종이로 여겼는데 반 구절 시도 쓰기 어렵네
  須彌山爲筆 四海水爲墨
  天地一丈紙 難寫半句時

  우리의 마음자리가 이렇게 큰 것이다.
  반야심경은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라는 주문으로 끝을 맺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바라승아제’란 번뇌가 없는 청정한 것을 말한다. 번뇌가 없으면 본래 청정한데 번뇌 망상이 들어서 흐려 놓았지만 이 자리는 본래 청정한 자리인 것이다. 바닷물이 맑고 고요한데 바람이 불어서 오래 출렁거려 파도가 일어나고 파도가 일어나면 거품이 생기고 거품이 바닷가에서 몇 천만 년이고 오래 경과 되면 돌로 된다. 제주도의 거품돌이 그것이다.
  바다에 바람이 일어 거품이 생기지만 거품이 본래 없듯이 번뇌 망상이 홀연히 일어나서 그렇지 번뇌 망상이 본래 없는 것이다. 이 자리는 번뇌 망상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청정하다는 것도 용납 될 수 없다. 이런 청정한 자리는 오욕 번뇌가 물들래야 물 들 수 없다. 이러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경계를 바라승아제라고 한다.
  깨끗한 고원高原이나 육지에는 연꽃이 자라지 못한다. 더럽고 냄새나며 썩은 진흙의 못에서 똥물이나 오색가지의 온갖 물을 묻혀가며 연꽃이 피어나지만 하나도 물들지 않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본래 깨끗한 자리를 스스로 오욕진뇌로 더럽혀서 살고 있지만 매일 한두 시간씩 자꾸 단련해서 청정한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가면 그 자리를 오욕진뇌가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 없고 남이 빼앗을래야 빼앗을 수 없는 자리인 것이다.
  어떤 주문呪文이든지 끝에 사바하를 붙인다. 이 사바하를 번역하면 속히 성취한다는 뜻이다. 6․25사변 후 사바사바한다는 말이 누가 지어 냈는지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듯하다. 사바사바해서 속히 성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래 전에 해인사에는 사바하 노장이 있었다. 어째서 사바하 노장이란 별호가 붙었는가하면 무슨 다라니多羅尼를 속으로 외는지 몰라도 늘 사바하 하고 또 사바하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보리菩提는 도이며 사바하는 행行하는 것이다. 모지 사바하는 도를 행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본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오달본성悟達本性이라 나의 본성자리를 깨달아서 통달하는 것을 곧 도행道行이라 한다. 보리는 요달 한다는 뜻이요 사바하는 본다는 뜻으로 요달해서 본다는 뜻이다. 모든 일을 자세히 보고 세밀히 알아야 실패가 없다. 요연본심了然本心이라 나의 본래 마음을 요달 해서 보라는 것이다.
  보라고 하니 눈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 말에 걸리면 안 된다. 도는 참으로 닦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운 것이라서 글을 보고 오해를 하게 되면 그릇되기 쉽다.
  진리 법문은 입을 열면 그르친다. 왜냐하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부처님이 어떻다 법이 어떻다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혀를 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법문을 할 때에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요 부처를 부처라고하면 부처가 아니요 법을 법이라고 하면 법이 아니요 선禪을 선이라고 하면 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체 이름과 모양이 떨어진 그 자리를 무엇이 어떻다고 자꾸 말을 하기 때문이다.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간 뒤로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구나.
  自從泥牛鬪入海
  直至如今無消息

할 한 번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