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만나
접촉함으로써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좋고 싫다는 느낌의 분별에서
온갖 집착이 생겨난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그 사이에서 온갖 시비 분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이 대상을 받아들일 때
그 대상 자체는 과연 분별할 것이 있는 것일까?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의 대상이
과연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차별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양과 색깔이라는 형상에서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고 좋고 싫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있지만
어떤 나무와 어떤 꽃은 옳고 다른 것은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일체 모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은
모두 무분별, 무차별이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차별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지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나뉨이란 없다.
태양과 달과 별, 바다와 시내와 강과 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정치인과 경제인 가운데 누가 옳은가?
서양의 여인과 동양의 여인과 아프리카의 여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를 뿐이지 분별할 수는 없다.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누고 차별하고
점수 매기고 등수를 매기는 따위의 나눔은 오직 인간들만이 한다.
이 대자연 법계의 모든 존재와 생명은
오직 전 존재로써 받아들일 따름이다.
인간들만이 세상을 대상으로 차별하고 분별하며
그렇기에 인간들만이 좋고 나쁘며 옳고 그르다는 등의
어리석은 극단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 극단과 나뉨은
곧 부조화와 평화롭지 않은 상태를 가져온다.
그로인해 인간은 늘 어지럽고 복잡하며 괴롭다.
세상은 다만 변화할 뿐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어리석고 좁은 소견으로
좋다거니 싫다거나 하는 차별을 가하지 말라.
세상은 다만 변화만이 있을 뿐,
좋고 싫은 것은 없다.
봄을 알리는 꽃이나
여름의 우거진 초록이나
가을의 오색 단풍,
또 겨울의 호젓한 눈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1, 2, 3, 4등 등수를 매길 수는 없다.
어느 계절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없고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다.
변화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 변화의 어느 한 과정을 콕 찝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맞다느니 틀리다느니,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차별하지 말라.
소리와 냄새와 맛 그리고 감촉 따위의 것들은 또 어떠한가.
그것들 또한 인연따라 잠시도 쉼 없이 변화할 뿐이지
차별되어 있지는 않다.
똑같은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기 좋은 말도 되었다가
또 어떤 이에게는 듣기 좋은 말도 될 수 있다.
청국장 찌개의 냄새처럼 똑같은 냄새가
어떤 때는 참 좋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구역질이 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육경, 대상에 대한 일체 그 어떤 분별도
다 우리들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이다.
세상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늘 여여하다.
다만 변화할 뿐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
본질은 무엇이든 다 부처이며 청정한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이 세상에 무엇을 차별하고 분별하며 나누겠는가.
무엇을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할 것이며,
무엇을 잘났다거니 못났다거니 할 것인가.
무엇을 크다거니 작다거니 분별할 것인가.
본질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도, 잘나고 못남도, 미추도, 장단도, 대소도,
그 어떤 나뉨도 없다.
두 가지로 나누게 되면 거기서부터 질긴 집착과
그로인한 괴로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분별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고 따라서 괴로울 것도 없다.
그렇기에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을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대상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은 세상을 올바로 정견으로 보는 눈이 아니다.
오직 중도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이나,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나,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둘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그대로 중도의 가르침이며
연기의 가르침이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인 삼법인의 가르침이다.
육근[육입]과 육경[명색]이
접촉[촉]함으로 느낌[수]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애욕과 증오[애]가 일어나고,
그럼으로써 집착[취]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온갖 업[유]을 짓게 되어
생노병사[생, 노사]의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십이연기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설법에
이어 수미산만한 사람의 몸을 비유하며
크고 작다는 분별을 비우도록 이끌고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을 놓아야 한다.
아니 머무는 바가 없으면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도 일어날 것이 없다.
바로 그 때 일체 모든 분별이 타파되며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정견의 눈이 열린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큰 것인가 하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는 크다고 답변을 드린다.
방금 설법한 것에 의하면
본래 크고 작을 것이 없어야 하는데
수보리는 왜 크다고 했는가.
이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법이다.
분별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아무런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며,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저 산의 나무처럼, 저 들의 돌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옳다 그르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고,
좋다 싫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크다는 마음도 내고 작다는 마음도 낼 수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음에 걸려 집착하면 안 된다.
옳고 그른 마음도 낼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교는 산중에 홀로 들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말며
은둔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종교인 것은 아니다.
큰 것은 크다고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다시 본문으로 가서,
부처님께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수보리에게 비유로써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형상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한다.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수미산만큼
큰 사람의 몸이라는 형상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이다.
큰 몸을 큰 몸이라고 하면 그것은 큰 몸이 아니다.
큰 몸은 큰 몸이 아니며 그랬을 때 큰 몸인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크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크고 작다고 방편으로써 말하고 있을 뿐
크다는데 머물고 작다는데 머물기 위해 크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매우 크다고 답변을 드렸지만
그 이유는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집착을 하여
작은 몸에 상대되는 ‘큰 몸’으로써 ‘매우 크다’고 했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하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크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형상에 머물러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 아니라
형상에 머무는 바 없이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답변이다.
차별을 넘어선 ‘법의 몸’, 법신(法身)은 어떤가.
그것은 크다 작다로는 표현될 수 없다.
수미산만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다.
법신의 몸은 한 티끌 속에도 포함될 수 있으며,
온 우주 법계 전체라는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법신은 항상 침묵으로
우뢰와 같은 사자후를 설함 없이 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었고 수보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철저히 머무름 없는 물음이고 머무름 없는 답변이다.
단순히 크다고만 답했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크다고만 했다면
그것은 ‘이생기심(마음을 낸 것)’이지만,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응무소주(머무는 바 없음)’가 설명 되었다.
큰 이유는 몸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기에
큰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큰 몸이라는데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산스크리트 원문의 답변을 들어 보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세존께서 몸, 몸이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것은 몸이 아니며,
몸 아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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